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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 김학만, 최봉준 선생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러시아 연해주에서 한인 단체인 '권업회'를 결성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한 이정호, 김학만, 최봉준 선생을 '2021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습니다.

권업회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한국인에게 실업을 장려한다'는 뜻의 경제단체로 창립되었으나, 실제로는 한국인을 결집하여 '조국독립'을 최고의 이념으로 삼고 있는 항일구국단체입니다.권업회 창립과 권업신문 발간에 기여한 이정호 선생님.

이정호 선생은 고종의 후근인 이용익의 손자로 1906년 10월 서울에서 애국계몽단체인 북한흥학회를 조직하였으며, 서북학회 서북협성학교 설립 초기에는 재정을 전담하고 교장을 맡아 항일운동에 참여한 사실이 일제 감시망에 포착되어 위험인물로 분류되었습니다.

1909년 10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이 일어나자 배후로 원산에서 체포되어 3개월 이상 수감되었다가 풀려났습니다.이후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그 당시 권업회는 태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선생은 창립총회에서 부의장으로 선임되어 권업회 조직과 '권업신문' 발간에 가장 중요한 재정적 후원자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권업회가 해산되고 선생은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되어 1년간 감금되었고, 이후 서울에서 살기 힘든 중구 산림동의 단칸방에서 쓸쓸히 돌아가셨습니다.권업회 초대 총재로 기반을 다진 김학만 선생

김학만 선생에 관한 일본의 정보보고학교 설립에 힘써 온 김학만 선생은 블라디보스톡 개척리에 최초의 한국인학교인 '계동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을 맡았습니다.

1910년 블라디보스토크 한인거류민회 회장으로 활동하다가 그해 8월 경술국치 소식이 전해지자 이상설 등과 성명회를 조직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성명회 선언서에 서명했습니다

독립군 기지 개척을 위해 연해주와 한국인의 주요 요충지인 중국 흑룡강성 일대에 한국인이 정착하는 '한흥동' 건설 사업도 적극 추진해 왔습니다권업회 창립과 권업신문 발간을 후원했던 최봉준 선생님.

최봉준 선생은 부모를 따라 8살에 한국인 최초의 이주지인 연해주 일대의 지신하에 정착하였고 이후 두만강 주변의 촌락을 개척하여 마을 대표로 추대되었습니다.

선생은 함경도 일대의 소를 러시아 군대에 수출하는 무역으로 자본가로 성장했고, 많은 재산을 모아 조국 독립에 재정적 후원을 하였습니다.

1908년 2월 한인사회에서 간행된 첫 신문인 '해조신문'의 창간을 재정적으로 지원하였으며,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 최초의 한인학교인 '계동학교'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재정적 지원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선생은 권업회 창립총회에서 총재로 선출되어 권업회 기관지인 '권업신문' 창간에 재정적 지원을 하였으며,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연해주 한인 자치기관인 고려중앙총회를 조직하여 기관지 '청구신보' 창간에 주력하였습니다.선생님들의 이런 권업회 조직을 통한 활동은 러시아 한인 사회교육과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항일투쟁의 효자였습니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이정호 선생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김학만 선생에게 201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최봉준 선생에게는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권업회 결성으로 러시아 연해주 동포들의 애국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던 12월 독립운동가를 기억하십시오.